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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海山을 기리는 모임

스님께서 내원암에 주석하시던 1976년 섣달 그믐날, 세배를 드리기 위해 올라가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리고 새해 아침 세배를 올리고 아침 공양을 마쳤을 때, 스님께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습니다.

마음에 들는지…….” “무엇입니까?” “펴 보면 알건데…….”

그래서 펴보니, 수계증受戒證 이었습니다. 얼른 일어나 삼배를 올렸습니다. 법명을 적어놓고 거기에 게송偈頌까지 지어서 써 주셨습니다. 너무도 황송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에서 스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씀만 드렸습니다.

 

朴 月如 居士

東奔西走是何址

是亦出世本願力

滿目靑山無寸樹

懸崖撤手丈夫也

 

西紀 一九七七年 一月 初日

密陽郡 丹場面 表忠寺 內院庵

鄭 海山 一氣

 

내가 바쁜 공직자公職者라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끄달려 다니지 말고 본연本然의 자리를 찾아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법명과 함께 게송으로 적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중 고등학생 때부터 절에 다니면서 불교를 가까이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도인道人으로 불리는 큰 스님들을 친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만, 스님만큼 행이 따르는 도인道人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아상我相이란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아무리 궂은일이라도 남에게 시키시는 일이 없이 손수 하십니다. 연로 하시면서도, 절에 군불 땔 나무까지 당신께서 하십니다. 부산 불교 청년회장 시절, 회원들과 수련회를 갔을 때, 스님께서 지게를 지고 나서시는 것을 보고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수련은 뒷전으로 우르르 따라가 나무를 해온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도 그래, 그거 할거지?”라고 하시지, “, 그거해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낮춤말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속에 너무 큰 스님을 모시고 있어서 웬만한 말을 들어도 좀처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1967년쯤이었습니다. 격무에 쫓겨 다니다가 모처럼 풀려나서, 스님계시는 표충사에 가서 한 20일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집에서는 혹시나 출가出家할 작정인가 싶어서 사람을 보내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그때만 해도 전기 시설이 되지 않았을 때라, 밤이 되면 경내境內는 인기척 하나 없는 적막으로 감싸이고 어둠을 몇 켜로 쌓아놓은 듯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비가 퍼붓고 연방 번개가 번쩍이며, 바로 옆에 떨어지는 듯한 뇌성벽력에 방이 흔들렸습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촛불을 켜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천둥 번개때문에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그냥 쳐다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덜커덩하고 방문이 열렸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스님께서 문 앞에 서 계셨습니다. 아마도 빗소리와 우르릉 쿵쾅거리는 소리에 밖에서 기척을 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던가 봅니다.

심심하제?” “방은 뜨신가?” 하시면서 방바닥에다 손을 대 보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누룽지가 담긴 그릇을 방에다 들이밀어 놓고 문을 닫고 가셨습니다. 우산도 없이 오셨었는데…….

그 날 도인道人의 마음, 도인의 마음씀, 용심법用心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높고 귀하고 특별한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낮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두고 가신 누룽지처럼.

그러하기에, 마음속으로 저며 들어와 파문을 일으키고 동화同化 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그 해 어느 날, 스님께서 조용히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고 김도완 선생과 함께 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부산 대학 병원의 수 간호사로 있던 신도분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병원에 계셨지만, 건강상태는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십수 년전에 이미, 72세까지는 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신도들의 걱정이 여간 아니었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내 이야기 단단히 들어라! 내가 말할 데는 없고, 너거 둘에게 이야기해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씀을 낮추어 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조이며 하명下命을 기다리고 있는데, “해동(김도완)이 너는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나를 쳐다보시고는 너는 이 절(광성사)를 발전시키고, 지켜라.”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이 가시고 난 뒤의 일을 두 사람에 각각 나누어 부탁하신 것입니다.

  

광성사는 일제시대때 그 주변이 공동묘지였으며, 그리고 그 건물은 관리인의 관사였다고 합니다일설에는 그 관리인이 스님이고 건물은 절처럼 쓰였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해방되고 난 뒤, 적산敵産 가옥家屋이므로 누군가가 불하拂下을 받았는데, 그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스님께서 대납하시고 인수한 것이라고 합니다. 땅모양이 지금처럼 된 것은 길이 나면서 일부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입적하실 임시에는, 1년 전쯤에 돌아가신 칠경화 보살의 명의로 되어 있었으므로, 명의변경에 대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 법정시한이 얼마 남지않은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비영리 법인法人 대승불교회大乘佛敎會의 회관會館으로 등록하기로 결정하고, 그 제반서류를 내가 서둘러 해다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서류를 한장한장 넘겨가며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하시며 일일이 손수 날인을 하셨습니다.

광성사의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은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낡아서 조금 조금씩 수리해 가며 사용하고 있던 터라, 스님의 입적 후에 건평 400평의 4층 건물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 시작한 일이라, 자금 관계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역부족으로 은행 빚에 넘어갈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익명의 독지가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가 그 당시 거액인 5억원을 시주하여 은행 빚을 모두 갚아주어서 그 어렵던 고비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모두가 눈으로 실감하는 기회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생전에 자주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의 장래에 관해 깊은 우려를 표명 하셨습니다. “내부內部의 자생력自生力으로 고쳐지기에는 병이 너무 깊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외부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야 하겠지.” “그 바람은 어디서 불어옵니까?”

스님께서는 묵묵부답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재차 조르듯이 물으니, “두고 보면 안다.”라고 만 하셨습니다.

김도완 선생과 나는 스님께서 거론하셨던 외부의 신선한 바람이 무엇일까를 시간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중국의 박해를 받고 있는 불교국가 티벳 국민을 도우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헌 옷가지 등을 수집하여서 한 컨테이너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티벳 아시아 영사관이 일본에 있었는데, 영사 역할을 담당하던 스님들을 자주 접촉하다 보니, 티벳 불교 속에 오늘날 한국 불교가 잃어버린 것, 다시 찾아야 할 것들이 남아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티벳 불교를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 스님의 뜻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궁리 끝에, 티벳 박물관이 있는 대원사로 티벳승려 초펠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번 방문한 결과, 초펠 스님을 광성사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광성사가 티벳불교 한국 사원이 되게끔 주춧돌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도완 선생의 끈질긴 집념이 큰 역할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Posted by 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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