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여雲如 거사 (* 나아란다 동문회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글)
◦ 김도완 법사가 해주신 해산 스님에 대한 회고.
6.25동란 때 공산당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몰고 내려오자 “스님, 이제 어찌합니까? 제주도로 피난을 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니 “가긴 어딜 가? 걱정 마라. 너희 눈에는 안보이겠지만, 이 부산에는 부처님의 보호막이 싸고 있다. 곧 물러 갈 테니 걱정 마라.”고 하셨는데, 며칠 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한군이 물러났다.
그때 젊은이는 길에서 보이는 대로 전장으로 데려갔고, 밤에는 집으로 수색을 나왔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나에게 “따로 할 일이 있으니 끌려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다. 두 번이나 밤중에 수색을 나왔다. 한번은 대나무밭에 숨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불빛을 비추어 보고도 그냥 갔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방안의 벽에 붙어서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분명히 보고도 그냥 가 버렸다.
학교에 근무할 때, 교법사敎法師를 약속했던 이사장이 약속을 어기고 일반교사를 맡기려는 바람에, 다툼이 있어서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래도 스님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표충사로 갔다. 조실방에 기척을 하고 들어서니, 스님께서 꼿꼿이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삼배를 드리고 앉으려는데, 갑자기 스님께서 온몸으로 방광放光을 하셨다. 말로만 듣던, 부처님의 거룩하신 상호相好를 나투시고 파안대소 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한참을 정신없이 있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스님께 주머니 속의 사표를 꺼내 보여 드리려는데, “낼 필요 없다. 다 알고 있으니 딴 생각 말아라.”고 하셨다. 그 바람에 입도 못 떼고 내려오게 되었다.
광성사의 운영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앞으로 법사를 원망하는 무리가 수없이 나타 날거다. 법사가 조선 중기 큰 사찰의 주지로 있을 때, 나라에서 배정해준 부역을 소속 절의 승려들에게 시키게 되어, 원망을 많이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 이었으므로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때 스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으니, “나는 역관譯官이었다.”라고 하셨다.
광성사에서, 하루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화장실을 가시는 스님의 뒷모습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스님께서 돌아보시지도 않고 방광을 하셨다. 마치 TV에 스파크가 일어서 팍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스님께서는 완전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분이기에, 신통이 자제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통은, 우리가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나투시는 것이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릇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하듯이, 거기에 담겨있는 부처님의 마음, 해산스님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 김도완 법사에 대한 소고小考
가끔 자다가도 ‘아하! 존자님(*해산 스님)이 그때 이 말씀을 하시더니,
나의 지금을 들여다보고 하신 말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김도완 법사님은 그 어른을 저에게 연결해 주셨고, 또 평생을 통하여 저에게 감화를 주셨던 분입니다.
법사님은 1930년생입니다. 존자님께서는 가끔씩 그 고집스러움을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저 사람이 저래 보여도, 영계靈界에서는 우리로 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이 나라 최고의 법사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젊어서 간염으로 사경에 이르셨지만 ‘할 일이 끝나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존자님의 예언대로 소생하여,
평생을 청소년 육성을 통한 불교중흥의 초석을 쌓고, Tibet불교를 이 땅에 옮겨 심는데 진력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깨달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으나, 불법의 바른길을 제시했고, 평생 명리를 탐하거나 위선 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국대 국문학과와 불교학과를 졸업, 또 동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하시고, 첫 직장이었던 마산대학교 교수재직 시, 뜻한 바 있어 종립학교宗立學校 해동 중학교로 옮겨 교법사敎法師로, 그리고 국어 교사로 평생을 계시면서 젊은 불자를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나아란다 청년회와 학생회 상임지도법사).
평생 양복 한 벌과 잠바 하나로 사시고 낡은 자전거에 물통을 싣고는 구덕산 약숫물을 절에 날라서는 제자들이 좋은 물 먹고 훌륭한 사람 되기를 기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입금의 10% 외에도, 검소하게 살고 남은 돈은 모두 보시로 돌리셨던 분입니다.
현재 그 출신들이 곳곳에서 그 뜻을 이어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 열매가 맺어지리라 봅니다.
김 법사님은 그 당시로써는 조금 앞선 생각을 하고 계셨는데, 그분의 사상을 대강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1. 깨달은 자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은 최상승 근기 몇몇에 해당하는 일이며, 6바라밀 보살도를 실천하는 성실한 사부대중의 화합한 힘이 무수히 보태져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승려들의 의식개혁이 중요한데, 현재처럼 승려들이 일반인보다도 더 학력이 낮아서는 신도들의 존경심이 일어날 수가 없다.
최소, 학사學士이상의 학력자에게 출가 자격을 주고, 출가 후 수행을 하면서도 대학에서 배운 전공으로는 직업(승려에게 적합한 직업은 의사, 교사, 간호사, 복지사 처럼 봉사하는 직업)을 가져서 자기가 번 돈으로 보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수행에만 전념 하려는 승려에게는 의식주를 일체 제공하여 걱정을 없애주어서 물욕物慾이 없는 모습을 신도들에게 보여주면, 신도들도 존경심이 나서 불교 중흥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존자님께서 지나가는 머리 깎은 비구니 스님을 보면서 “저래서 되겠나?” 하셨는데 법사님이 “아니요.” 하니 “그렇제.” 하셨다고 합니다.
교사나 간호사 등의 직업을 가진 비구니 스님이라면, 일반인들과 매일 접해야 하는 만큼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단정한 정도의 두발을 허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현재 비전문가非專門家인 승려들이 모든 분야의 불교사업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불교발전의 가장 큰 장애요소인 만큼, 장학 사업으로 미래의 불교를 짊어질 각계各界의 전문가專門家 양성이 시급하다면서, 나아란다 학생회 회원들을 청년회의 대학생들이 책임지고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지만 “복이 엷어서 큰 도움을 못 준다,”며 항상 안타까워하셨고, “지혜와 복덕은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3. 그 외 종립학교를 많이 세우고 불교병원과 언론사 설립, 봉사시설을 활성화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기복불교에서 베푸는 불교로’의 승려와 재가불자들의 의식 전환, ‘사부대중의 평등으로’의 의식전환으로 서로 간에 건전한 견제와 화합이 있어야 부패하지 않는다는 등의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4. 해방 후, 존자님께서 적산가옥으로 경매에 나온 광성사에 백화가 만발한 것을 보시고 “백화도량이니, 구매하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이 자리에서 출가자出家者와 재가자在家者할 것 없이 수많은 도인이 나올 것이다.”라는 예언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5. 한때 법사님께서 “앞으로 우리나라 불교가 이대로 괜찮습니까?” 하니 존자님께서 고개를 옆으로 저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찌합니까?'” “외부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야지.” “그 바람은 어디서 옵니까?'” “두고 보면 알 거다.”
그래서 그것을 화두로 평생을 찾다가 결국 그 ‘외부’라는 곳이 티베트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 당시에는 은퇴 후 택시 기사로 계셨는데, 그 택시를 몰고 다니면서 삼고초려 끝에 최초의 주지로 쵸펠 스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현재는 소남 스님이 주지로 계심).
6. 티벳 정부와의 연락 끝에 최초의 한국 티벳 센터가 새로 지어져 완공되던 해에, 제자들에게 업혀서 한번 오시고는 간암으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49재 기간에 가족들 모두에게 티벳 승려로 환생하신 모습을 보이셨다고 하며, 시신은 유언에 따라 병원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타오르던 불꽃 같은 법사님의 삶을 지켜보면서 ‘저분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수행 보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로 또한 존자님의 자식으로 또한 존자님을 곁에 모시면서, 그리고 평생을 녹슬지 않는 일념으로 용맹정진하는 월봉 스님과 다른 제자 분들을 지켜보면서, 이번 생을 사는 저 역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한국 불교가 존자님의 은혜로 티벳 불교와 상생하여 각각의 장점을 흡수하여 꽃피우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나무 불.법.승.
운여 박달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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