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말 부산에 있는 한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고 있던 중, 불교에 신심이 깊은 동료 근무자 도오道悟 박영도 거사로부터 부산‧경남 불교 청년연합회에서 주관하는 동계冬季 수련회에 동참하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별 관심이 없어서 연말 휴가를 얻어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12월 30일 밤 내가 어느 절—내원암인 것 같은—의 대문을 들어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꿈의 장면이 너무도 생생해서 실제로 그곳에 갔던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짐을 꾸려 도오 거사가 이야기한 내원암을 찾아갔습니다.
절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고 삼배三拜 조차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문외한이었지만, 어찌어찌해서 2박 3일의 수련회 일정을 마쳤습니다. 해산 스님께서 수계를 주시고 동등同等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이 되라고 주시는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 그로부터 내원암을 자주 오르내리면서 신심을 키워갔고, 77년에는 해동海東 불교 청년회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어느 일요일 내원암으로 스님을 뵈러 갔습니다. 한 더위 속에 산을 오르자니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스님께 삼배를 올린 뒤 “출가出家를 하고 싶습니다. 저가 출가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계셨습니다. 뒤에 생각해 보니, 외동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라서 그렇게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고 떠나지 못하는 내 심정을 스님께서 읽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을 꺼냈습니다. 스님께서는 젊은 시절 금강산에 자주 가셔서 수행하셨다는 말을 듣고 있었던지라, “스님, 금강산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땀범벅이 되어 있는 나를 쳐다보시면서, “니, 지금 굉장히 덥제? 그런데 이럴 때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면 어떻겠노? 바로 그와 똑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금강산을 묻는 질문에 번뇌로부터의 해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출가수행의 묘미妙味를 실감實感 할 수 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연의 끈에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수행이란 그렇게 멋진 것이니 구도심求道心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는 스님의 마음이 담겨 있음을 느꼈습니다.
綠樹蟬音欲殘處 무성한 나무에 매미 소리 떠나고 싶지 않지만,
草裡蟋蟀又一新 풀숲에서 우는 귀뚜라미 그 또한 새로운 것이니.
莫敎月下子鳺啼 달밤에 소쩍새를 울리지 말고,
寂寂禪林豎柱杖 적적한 선림에 주장자를 세워라.
<해산 게송>
그렇게 스님을 의지처로 살아가던 중, 직장이 부산에서 창원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이사를 가게 되면서 스님을 뵙는 기회가 다소 줄어들었고, 급기야 1980년 스님의 입적入寂으로 스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스님과의 정말 짧은 5년이었습니다.
◎ 1983년 12월, 그 당시 마산 불교 청년 회장으로서 동계 수련회를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갖기로 결정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성전암으로 철웅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허락을 받고 내려오는 길에 파계사에 들러서 노스님이 계시면 인사를 드리고 가려는 마음에서, “여기에는 어떤 노스님이 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종사宗師 스님 두 분이 계시는데, 한 분은 한암 스님의 법상좌 고송 스님이며 또 한 분은 자운 스님의 율맥律脈을 이은 대율사大律師 일우 스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극락전에 일우당 종수 스님이 계신다.”고 하기에, 찾아가 뵈었습니다. 삼배를 올리고 난 뒤, “저는 지금 세간에서 큰 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스님들을 웬만큼은 참례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입적하고 계시지도 않는, 그냥 시골 할아버지 같았던 해산 스님만큼 마음에 와 닿는 스님은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어느 모로 보나 해산 스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어째서 그런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의 나는 스님의 입적으로 생겨난 지워지지 않는 상실감喪失感 때문에 스님을 대신 해 줄 또 다른 의지처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우 스님께서는 “그것은 해산 스님과의 전생前生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면서, “그래, 해산 스님을 잘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예, 해산 스님의 유발有髮 제자입니다.”라고 하니, “그렇느냐. 내가 해방 전에 금강산 보덕굴에서 고봉古峰 스님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을 때, 해산 스님과 한철을 같이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 1994년 12월 22일, 그 날은 열네 번째 맞는 스님의 기일忌日이었습니다. 스님을 처음 뵙던 때가 19년 전이고 스님이 입적하신지도 14년이 지났는데, 스스로의 공부는 물론이고 스님의 은혜에 보답할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自愧感으로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그래서 절친한 도반 박도오 거사를 찾아가서 상의한 결과, 스님이 남기신 법문을 모아 책으로 엮어서 법보시法布施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뜻을 같이했습니다. 둘이서 쫓아다니면서 한 달 만에 스님이 호불법회에서 하신 총 13편의 설법 중 12편을 모아 『해산 대선사 법어집』이란 표제를 붙여 법보시용으로 발간했습니다.
◎ 그 뒤, 진제眞際 스님 문중에 늦깎기로 출가出家를 했습니다. 너무도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출가 초기에는 막차를 탔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맹렬한 구도심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선방에서의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밀고 나갔지만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나이 때문에 심신心身이 모두 부친다는 현실을 자인自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내세來世를 기약하며 공덕을 쌓는 길을 택하여, 포교의 일선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또 젊은 시절, 백의白衣 때부터 포교사 자격으로 활동을 많이 해보아서 그 분야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데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시어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언덕 가사이다
이세상의 명과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마다 좋은국토 밝은스승 만나오며
바른신심 굳게세워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눈이 총명하고 말과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안들고 맑은행실 닦고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어기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생명 사랑하며
이내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發願文 중에서>
◎ 2007년 신도 80명과 함께 리무진 버스 3대에 편승하여 금강산 관광을 갔습니다. 나에게는 관광이 아니고 성지聖地 순례였습니다. 스님께서 젊은 시절, 마하연 선방에서 3년 결사結社를 하셨고 보덕굴, 신계사 등 금강산 내의 수행처에는 안 살아본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금강산 전체에 스님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갈 그때는 금강산 관광이 어느 정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는지, 이제껏 외금강外金剛만 관람하게 하다가 우리가 출발하기 바로 일주일 전에 내금강內金剛까지 공개하여 관람할 수 있게 한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절호의 기회로 알고 미리 여행사에 하루 일정을 내금강으로 잡아 주도록 신청했습니다.
내금강을 관광하는 날, 나는 마치 스님을 친견하러 가는 것처럼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습니다. 묘길상사妙吉祥寺에서 내려오면서 마하연 선방터에서 참배를 하고 만폭동 보덕굴로 갔습니다. 스님께서 설법하실 때 관세음보살의 현신現身인 ‘보덕각시’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만폭동의 출렁다리를 건너가니까 북한 경비병 두 사람이 막고 서서 더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수행하시던 곳이니 꼭 한번 들어가서 스님이 앉아계시던 모습을 상상으로라도 한번 떠올려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스승이신 큰 스님께서 해방 전에 수행하시던 곳이며, 다시 오기 어려우니, 이참에 꼭 한번 참배하고 가게 해 달라.’고 빌듯이 사정하고 또 사정했습니다—사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뜻밖에도 나에게만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열고 들어서니 2~3평 됨직한 굴이 건물 안쪽에 있었습니다. 굴속에는 나무로 바닥을 깐 마루가 있었고 불상이나 보살상 같은 것은 모셔져 있지 않았습니다. 6.25전에는 이곳에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딴 부속 건물에 인공으로 굴을 파서 거기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잠시 들어갔다 나오라고 했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서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장 찍어 달라고 경비병에게 부탁했더니, 선뜻 찍어주어서 그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믿기 어렵다고 해서 그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러고 나서 더 내려와 장안사 터를 거쳐 표훈사에서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 * 인암 스님께서는 포교의 내용과 체계를 충실히 갖추기 위해 동국대학교 선학과와 동 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셨으며, 동화사 한문 불전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대중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보현사, 관오사, 원효사 등의 포교당을 거쳐서, 지금은 대구의 재래시장인 칠성시장 한켠의 건물 2층에 있는 칠성관음사에 주석 하시면서, 삶의 현장 속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부처님의 자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 불교 사회복지회의 지도스님께서 최초로 시작한 108 사찰 순례단의 초대 단장 법융 스님의 뒤를 이어, 2002년부터 2대 단장을 맡아서 대구 경북을 주축으로 한 전국신도 천여 명이 참여한 108개소의 사찰 순례를 무사히 마무리 짓고 회향을 했습니다. 그 뒤로도 개적個的으로 지금까지 9년 동안 신도들과 함께 사찰순례를 계속해 오고 있으며, 부산 마산등지로 출강出講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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